[주민자치 가로막는 입주자회의… 밀실회의로 주민 눈·귀 가리고 非理 은폐]
비리 의혹 입주자대표 탄핵에 주민들 12% 넘게 동의하자
발의요건 멋대로 20%로 높여… 규약개정 사실 주민엔 안알려
다른 사람 출마 막는 꼼수도 - 선거공고문 낸 지 사흘 안으로 30명 추천받아 후보등록 요구
경기도 부천의 한 아파트 주민 정모(52)씨는 올 초 동대표가 되고 나서 아파트 관리비에서 매달 300만원가량이 위탁수수료와는 별도로 위탁 관리 업체 S사에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S사는 계약에 따라 위탁수수료를 월 280만원씩 받고 있다. 그런데 주민들에게 돌리는 관리비 내역서에 표기되지 않는 '본사 수수료' 명목으로 월 300만원씩이 관리비 통장에서 또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씨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에게 "본사 수수료라는 명목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가진 나도 처음 본다. 도대체 무슨 돈이냐"고 따졌다.
이 일이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위탁 관리 계약이 수상하니 관리 업체를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전체 주민 12%가 넘는 63가구가 '관리 업체 교체 요구' 서명을 했다. 주민들이 항의하는 와중에 입주자대표회장이 입주자회의 결의나 주민 동의도 받지 않고 1400만원짜리 주차 차단기 공사 계약을 맺은 일도 드러났다.
주민들은 '회장 탄핵' 절차에 들어갔다. 주택법 시행령 등에는 주민 10% 이상이 서면 동의하면 입주자대표 해임안을 발의할 수 있다. 그러자 입주자대표회장도 '행동'에 나섰다. 가까운 동대표들을 소집해 해임 발의와 관련한 아파트 관리규약을 '주민 20% 이상이 발의할 때'로 뜯어고쳤다. 규약 개정 사실은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정씨 등 주민들은 "일부 입주자대표가 법령을 위반해 놓고도 '입주자회의가 의결한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며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밀실(密室) 결정'은 정치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부 아파트의 비뚤어진 입주자대표와 관리 업체가 결탁해 밀실에서 공사 계약을 맺고, 비리를 숨기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들이 주민들의 눈귀를 가리고 입을 막는 사이 아파트 관리비는 줄줄 새나간다.
◇문제 지적하는 주민 막는 철문까지 등장
서울 강북의 J아파트에선 몇년 전 '철제(鐵製)셔터'가 아파트 내 비리 의혹을 제기한 주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파트 감사였던 A(56)씨는 2010년 관리사무소 경리의 내부 제보를 받았다. 경리는 "전기요금이 더 많이 나오는 잘못된 계약이 방치돼 있고 적법한 수당을 못 받고 있다"고 고발했다.
지난 2010년 서울 강북에 있는 J아파트 관리사무소 2층 입주자대표회의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철제 셔터’로 막혀 있다. 이 아파트 감사 A씨(왼쪽)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관리사무소 직원이 막고 있다. /강북 J아파트 주민 제공
A씨는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석해 "감사를 하자"고 주장했지만, 무시당했다고 말했다. A씨가 계속 '감사'를 주장하자, 황당한 일이 생겼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입주자대표 회의실로 가는 계단 앞에 설치된 철제 셔터를 걸어잠그고 A씨의 회의실 출입을 봉쇄한 것이다. A씨는 항의해봤지만 직원들은 "입주자대표회장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당한 입주자대표 선거
주민들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는 '꼼수'는 입주자대표 선거 때부터 동원된다.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에선 지난 6일쯤 조합장 선거 공고문을 담은 등기우편이 각 가구에 도착했다. 5년 전 준공된 이 아파트에는 재건축 조합과 입주자대표회의가 각각 따로 있다.
주민 상당수는 '조합장 선거 공고문' 내용을 보고 혀를 찼다. 공고문에는 '후보 등록 9일까지. 조합원 30명 추천을 받아야'라고 돼 있었다. 공고문을 받고 사흘 이내에 출마 결심→이웃 30명의 추천→입후보 등록을 끝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아파트의 주민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이렇게는 안 한다"며 "조합장 연봉이 8000만원이라는데 그 기득권을 지키려는 꼼수라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올 초 경기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선 동대표로 출마한 이모씨의 출마 자격 시비가 붙었다. 이씨는 구청에서 '출마 자격이 있다'는 유권해석을 받아냈지만 아파트 선관위는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선관위는 도리어 "이의 있으면 아파트 가격 떨어지게 언론사, 관공서(구청)에 고자질하지 말고 법원에 소송하라"는 공고문을 붙였다. 이씨는 "고자질쟁이가 된 것 같아 황당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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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위에 잠자는 주민들 - 40% "주민대표 투표 안해봤다"
주택법 시행령과 지방자치단체 규칙 등에는 아파트 입주민들이 입주자대표의 해임을 의결하고, 외부 회계감사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관리비 사용 내역 등도 관리사무소에 요구해 열람·복사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입주자대표회의나 관리사무소가 주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면 구청으로부터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법은 너무 멀리 있다. 민원을 제기해도 구청이 "사적 자치(自治) 원칙에 따라 자체 해결하시라"고 손을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민 스스로 권리 위에 잠자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연구원이 2010년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아파트 관리 실태조사'(500가구 면접)에 따르면 아파트 주민 4명 가운데 3명은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석해 본 적이 없고, 주민대표 투표를 해 본 일이 없는 주민이 40%나 됐다.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석해봤다'는 응답은 25.2%(126명), '참석한 적이 없다'는 응답은 74.8%(374명)였다. 투표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거나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는 주민은 62.8%(314명), 자주 참여하거나 항상 참여한다는 주민은 각각 22.8%(114명), 14.4%(72명)로 나타났다. 조사에선 세입자의 투표 참여율이 집 소유자보다 크게 낮았다. 아파트 관리 관련 불만을 해결하는 통로로 관리사무소를 꼽은 주민이 80.2%(401명), 입주자대표회의를 꼽은 주민은 9.2%(46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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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市, 특별조사단 운영키로
서울시가 아파트 비리 해결을 위한 특별조사단을 운영키로 했다.
서울시는 시 본청과 25개 자치구 합동으로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관리비 비리 등 아파트 관리 운영 실태에 관한 특별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19일 밝혔다. 조선일보의 '댁의 아파트 관리비 새고 있진 않나요' 보도 이후 아파트 관리와 관련된 시민의 신고와 문의가 급증한 데 따른 것이다. 서울시는 조사 매뉴얼을 정비하고 우선 조사 대상 아파트 단지를 선정하는 등 사전 준비 과정을 거친 뒤 특별조사단을 직접 현장에 투입할 예정이다.
특별조사단은 오는 6월 30일까지 민원이 잦은 아파트 단지 100여곳에 우선적으로 특별 조사를 진행하고, 결과에 따라 올 하반기까지 연장 운영할 계획이다.
아파트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 집행 실태, 관리규약 준수 여부, 관리비 내역 및 회의록 공개 여부 등이 집중 점검 대상이다. 시는 이번 특별 조사에 최소 4억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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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 가락쌍용 1단지]
160여차례 회의 녹화해 보관, 주민이 요구하면 언제든 제공
"입주자대표 출마자가 경력이나 학력을 허위 기재하면 자격을 박탈해야 합니다."(502동 대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출마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허위 기재를 하겠습니까."(103동 대표)
지난 2003년 9월 30일, 서울 송파구 가락쌍용 1단지 관리사무소 3층 입주자대표회의 사무실에선 관리 규약 개정 문제를 놓고 동대표들 간에 설전(舌戰)이 벌어졌다. 찬반이 맞서 투표를 했다. 투표 결과 과반인 7명 동대표가 찬성해 '허위 학력이나 경력을 기재한 후보는 당선 무효'라는 조항이 관리 규약에 들어갔다. 이날 회의는 실시간으로 주민들에게 생중계됐다.
15일 서울 송파구 가락 쌍용 1단지 입주자대표회의 사무실에서 주민대표와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회의 녹화 동영상을 보고 있다. 이 아파트에서는 1998년부터 회의를 주민들에게 생중계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약 10년 전 열린 회의지만, 회의 장면은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녹화 테이프가 관리사무소에 보관돼 있고, 주민이 요구하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락쌍용 1단지가 입주자대표회의를 주민에게 생중계한 것은 15년 전인 1998년부터다. 관리사무소 관리과장 김성래(47)씨는 "1개당 1시간 분량인 6mm 녹화 테이프가 600개는 넘는다"고 말했다.
생중계는 위탁 관리 회사 재계약을 앞두고 시작됐다. 계약을 투명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직접 주민들에게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당시 입주자대표들은 지역 케이블방송사의 자문을 얻어 입주자대표회의를 촬영하는 캠코더와 관리사무소 메인 서버를 연결했다. 관리사무소 서버에 들어온 화면은 곧바로 각 가정 TV로 송출된다. 지금까지 160여 차례 회의가 생중계됐다고 한다.
주민이 원하면 과거 회의록도 열람이 가능하다. 입주자대표회장 민주동(66)씨는 "회의가 중계되면 집에서 녹화하는 주민이 있을 정도로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외부 회계감사도 매년 받고 있다. 관리사무소장 김창현(52)씨는 "회계자료는 5년간 보관하게 돼 있지만 우리는 영구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